인공지능(AI)과 로봇 기술의 발전 속도는 이제 우리의 예측을 하찮게 만들 정도로 빠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단순 노동'만이 기계로 대체되고, '고차원적 지적 노동'은 인간의 고유 영역으로 남으리라 막연히 믿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 예측을 철저히 빗나가고 있습니다. 최근 법률 시장에서는 신입 변호사나 인턴이 일주일간 준비한 서류보다, AI가 한 시간 만에 만들어낸 결과물의 수준이 더 높다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고도의 지적 영역이라고 믿었던 법률, 의료, 경영 판단의 영역에서조차 AI는 인간을 빠르게 대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거대한 변화 앞에서 우리는 불안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근본적인 질문에 다다릅니다. AI가 우리의 노동을 대체한 시대, 우리는 어디에서 '인간 고유의 가치'를 찾아야 할까요? 이 질문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를 넘어, 우리 존재의 이유를 묻는 철학적 질문이기도 합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났을 때: 인간의 선택
우리는 인공지능의 윤리 문제를 논하기 전에, 과연 우리 인간 스스로 윤리적 정답을 가지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아주 유명한 철학적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열차의 기관사입니다. 이대로 직진하면 선로를 보수 중인 6명의 인부가 목숨을 잃습니다. 다행히 비상 철로가 하나 있지만, 그곳에도 1명의 시민이 걷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핸들을 꺾어 비상 철로로 향하면 6명은 살릴 수 있지만, 1명이 희생됩니다.
여러분은 직진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핸들을 꺾으시겠습니까?
많은 분이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를 살리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하며 핸들을 꺾겠다고 답합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옳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보겠습니다. 만약 그 비상 철로에 있는 1명이 여러분의 가장 소중한 가족이라면, 그래도 핸들을 꺾으실 수 있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선택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윤리적 판단은 하나의 절대적인 원칙으로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감정에 따라, 관계에 따라 흔들리며 완벽한 합의점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AI의 딜레마: 윤리와 자본주의의 충돌
이제 이 딜레마를 인공지능, 특히 자율주행 자동차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상상 속의 질문이 아닙니다. 엔지니어들은 이 윤리적 판단을 AI 알고리즘에 '프로그래밍'해야 하는 현실적 과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자율주행차가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처했을 때, AI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운전자 1명을 희생하고 6명의 보행자를 살려야 할까요?
만약 공개적인 토론을 거친다면, 사회적 공감대는 '다수를 위해 소수(운전자)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모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이 '더 도덕적인' 선택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치명적인 역설이 발생합니다.
사회적 합의에 따라 '비상 상황 시 운전자를 희생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자동차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은 수억 원을 지불하고 그 차를 구매하시겠습니까? 나를 죽일 수도 있는 자동차를 선뜻 구매할 소비자는 없을 것입니다.
자동차 회사의 CEO라면 어떨까요? 자본주의 논리 안에서 기업은 이윤을 추구해야 합니다. 차가 팔리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운전자를 최우선으로 보호한다'는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설령 그것이 6명의 보행자를 희생시키는 결과로 이어지더라도 말입니다.
결국 인공지능의 윤리 원칙은 숭고한 철학적 합의가 아니라, '매출 극대화'라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 결정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우리가 인간조차 완벽한 답을 찾지 못한 윤리적 선택의 문제를 AI에게 떠넘기려 할 때, 우리는 기술이 아닌 자본의 탐욕에 그 답을 맡기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AI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선택의 문제만큼이나 심각한 것은 '혐오의 문제'입니다. 아주 오래된 철학 우화 중에 '투명인간 반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범한 양치기가 우연히 투명인간이 되는 반지를 얻게 되었을 때, 그는 가장 숭고한 도덕적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왕을 시해하고 왕비를 차지하는 등 가장 폭력적이고 탐욕스러운 본성을 드러냅니다.
이는 익명성이 보장될 때 인간이 얼마나 쉽게 도덕의 경계를 무너뜨리는지 보여줍니다. 지금 우리는 AI 챗봇과의 은밀한 대화, 혹은 익명성이 보장된 인터넷 공간에서 우리의 가장 어둡고 폭력적인 면모를 여과 없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AI는 바로 그 데이터를 학습합니다. 인간의 혐오와 편견을 학습한 AI가 과거의 성차별적 채용 결과를 그대로 답습한 사례는 이미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AI에게 인간의 가장 숭고한 도덕성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익명성에 기댄 우리의 혐오와 폭력성을 주입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기계가 아닌, '나'를 되돌아볼 시간
AI는 지치지 않습니다. 24시간 학습하고 일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인간은 잠을 자야 하고, 쉬어야 하며, 한계가 분명한 시간을 살아갑니다. 노동의 효율성 측면에서 인간은 AI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불안감을 줍니다. 일자리를 잃고 기계에 의해 소외될지 모른다는 공포는 과거 러다이트 운동(기계 파괴 운동) 시대의 공포와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인문학자로서 저는 감히 다른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왜 AI와 '경쟁'하려고 합니까? 왜 기계의 속도에 맞추어 우리 자신을 혹사해야 합니까?
저 역시 한때는 독하게 노력하는 것만이 성공의 길이라 믿으며 건강을 잃을 때까지 일했습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잃고서 얻어야 할 가치 있는 성취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인공지능으로 대체되지 않는 인간의 고유한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공감과 위로에 있습니다. 기계는 감정이 없습니다. 아무리 친구처럼 대화해도, 시련을 겪은 이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네고 그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그것은 또한 '느림'에 있습니다. 알고리즘의 노예가 되어 자극적인 콘텐츠에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추어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이 내 영혼을 숭고하게 만드는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아날로그 노트에 연필로 나의 꿈을 적어보는 행위, 내 인생을 대표할 책 세 권을 고르기 위해 서점을 거니는 그 시간 속에 인간의 가치가 있습니다.
인공지능 시대의 윤리는 기술을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의 문제를 넘어, 우리 스스로 '어떻게 더 인간다워질 것인가'를 성찰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내면의 맑은 정신을 지키고, 숫자로 설명되지 않는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돌보는 것. 그것이 AI가 열어갈 새로운 시대에 우리가 찾아야 할 단 하나의 답일 것입니다.